*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 미국의 전설, 게리 쿠퍼 ]
여자를 유혹하는데 단 세마디의 말이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설마??"
"정말??"
"처음 듣는 말인데..."
이런 망언을 한 인물이 바로 게리 쿠퍼이고 그의 얼굴과 키(191cm)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팬들에겐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하이눈>으로 많이 알려진 게리 쿠퍼는 1930-40년대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배우였습니다.
미국 몬타나주에서 태어난 게리 쿠퍼는 어린 시절에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미국으로 다시 건너와 대학 재학 중 연기자로 행로를 변경하였습니다. 몇 년의 단역시절을 거친 게리 쿠퍼였지만 출중한 외모와 훤칠한 체격의 그를 보고 감독들은 단번에 주연급으로 캐스팅하였고 1930년대부터 그는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영화배우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정의로운 군인.카우보이.법조인 등 다양한 역할에 모두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인 그는 영화 <요크 상사>와 <하이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번씩이나 수상할 정도로 연기력도 뛰어난 배우였으며, 동료 배우들에게도 인기 만점의 스타였습니다.
* <하이눈>에서
하지만 잘 생긴 놈 인물값 한다고 게리 쿠퍼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바람 잘날 없는 스캔들을 일으키며 가십란의 주인공을 도맡아 하였죠. 이미 결혼한 몸이었지만 그에겐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같이 공연한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그레이스 켈리. 마들렌느 디트리히 등 당대의 톱 여배우들과 바람을 핀 것은 물론이고 패트리샤 닐은 게리 쿠퍼와 바람을 피다가 그를 못잊어 자살 소동까지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바람둥이 남편을 둔 게리 쿠퍼의 마누라는 얼마나 속이 썩었을까요? 게리쿠퍼와 부인은 이혼은 안하였지만 말년엔 거의 별거 상태로 지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건강에 적신호가 있다고 의사에게 주의를 받은 게리 쿠퍼는 중년의 나이로 넘어가면서 그 영향이 서서히 오기 시작하였고 결국 전립선암이 온몸으로 전이되면서 60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시대를 주름잡은 헐리우드의 별은 그렇게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였던 배우. 미국인들의 연인이라는 애칭을 받을 정도로 인기를 누린 게리 쿠퍼는 영화 속에서 보여준 카리스마와 실제의 매력만으로도 충분히 인기를 누릴 만하였습니다.
바람피는 것도 능력이라고 도도한 헐리우드 톱 여배우들도 그와 몇 마디를 나누면 넘어 올 정도로 마성을 지닌 남자였다고 합니다.
이런 불가사의한 매력에 영화배우로서도 잘 나가는 게리 쿠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지만 연기자로서 보여줄 건 다 보여주었으며, 남자들이 보더라도 한번쯤 “나도 게리 쿠퍼로 살아보고 싶다” 라는 부러움을 안겨줄 정도로 모든 것을 가진 남자가 바로 게리 쿠퍼였죠.
미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사석에서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제가 만약 대통령 선거를 치룰 때, 그 친구가 나왔다면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렇게 생긴 친구는 생전 처음 봤어요. 그리고 그 웃음은 또 뭐라고 표현해야합니까.. 아마 여자 유권자들에게 몰표를 얻었겠죠.."
1927년 게리 쿠퍼는 엑스트라 생활을 끝내고 무성영화의 마지막 시즌 오프작인 <날개>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생각만큼 큰 배역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웨스턴 무비, 로맨스영화, 지적인 멜로물, 등 어디에도 완벽하게 들어맞았습니다. 191센티미터나 되는 큰 키는 그 당시 클라크 게이블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험프리 보거트처럼(173센티미터) 대다수의 스타들은 촬영장에서 트레일러 레일에 올라서야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실제로 총잡이이며 법 수호관(판사)이었던 부친과 의사출신의 모친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바로 윗 형인 아서와 함께 영국에서 머물며 십대 시절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의감으로 가득차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전장에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고향 몬타나의 헬레나에서 의사가 되길 바라던 모친의 뜻을 받들어 한동안 의학에 몰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배우의 길은 그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직업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배우였던 발렌티노의 죽음은 헐리우드 안팎에서 모든 매체들을 뒤흔들어 놓을만큼 대단한 이슈였습니다. 그 일을 지켜보던 그는 기필코 영화배우로써 성공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스튜디오에서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와 여배우 클라라 보우를 만났습니다.
* <요크 상사>에서
세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헤밍웨이는 그에게 적합한 작품을 선물하기위해 작품구상에 몰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은 <무기여 잘있거라>였습니다(나중에 록 허드슨과 제니파 존스가 나와 리메이크 된). 전쟁 중에 일어난 군인과 간호사의 로맨스는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조각상같은 얼굴은 순식간에 여성 팬들의 일반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스튜디오 시대의 스타로 올라섰습니다. 그는 다음해, 그러니까 1933년 무명배우인 산드라 쇼와 결혼을 하고 마리아 쿠퍼라는 딸을 낳았습니다.
마리아 또한 훗날 배우가 되기는 했지만 늘 아버지의 바람끼에 대해 공개석상에서 비난을 퍼부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물과 기름의 관계였습니다. 그는 항상 딸과의 소원해진 관계를 풀기위해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 <무기여 잘있거라>에서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결혼 생활 와중에도 수많은 배우들과 염문을 뿌리곤 했습니다. 그 스타트는 친구였던 클라라 보우였습니다. 두 사람의 로맨스는 적당히 이해관계가 얽힌 지극히 헐리우드적인 연애였죠. 그리고 그는 멕시코 출신의 '암캐' 루페 벨레즈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처음으로 아내인 산드라는 그가 없는 자리의 공백 상태를 실감했습니다. 그를 향한 애증의 후유증은 정신적인 치료로 이어지고 말았고... 그러는 사이, 그는 <뱅갈랜서의 삶>, <욕망> 그리고 <디즈씨, 도시로 가다>의 촬영지에서 자신의 영화적 완성도를 치밀하게 쌓고 있었습니다.
그는 <디즈씨, 도시로가다>의 리얼한 연기로 첫 오스카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았고 서부극과 멜로드라마에서 자신의 입지를 견고히 했습니다. 1941년 그에겐 가장 미국적인 모델을 제시해준 해이기도 했습니다.
존 웨인과 더블어 미국의 '헐리우드 드림'을 실현해준 인물이기도 한 그는, 그해 가을 멋진 <요크 상사>가 되어 다시 한번 정상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영화를 통해서 정의감과 당당함을 보여주었고 생애 처음으로 오스카상의 메인 자리에 앉게 되는 겹경사를 맞이했다.
모두들 그에게 기립박사로 환호를 보냈습니다. 1943년 친구 헤밍웨이가 잉그리드 버그만을 위해 선사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친구의 연인(?)인 잉그리드 버그먼과 거부할 수없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공연한 배우들의 연인이었습니다. 무슨 영화를 찍든 상대 여배우들은 그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1949년은 그에게 상처와 치욕의 해였습니다. <마천루>에서 공연한 패트리샤 닐과의 스캔들이었습니다. 패트리샤는 영화에는 관심조차 없는듯 했습니다. 두 사람은 밤낮 안가리고 섹스에 빠져있었죠.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가정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아내인 산드라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 패트리샤 닐
패트리샤도 자살을 시도했지만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녀는 정신병동의 가장 구석진 방에서 그와 마주앉아 있었습니다. "당신을 소유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떠나는게 낫겠어요. 제 마음 이해하시죠..?"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해에 관한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은둔생활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 후, 자신의 영화인생과 삶이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달아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영화적 지명도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2년 동안, 극심한 심적 고통에 시달리며 자신이 저질러온 과오에 관한 깊이있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게리 쿠퍼는 그제서야 한낱 잘생기고 매력적인 배우가 더 이상 아님을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주입시켰습니다.
2년간의 부침의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매력적인 요소는 클라크 게이블이 가져가버렸고, 걸출한 외모는 로버트 테일러가 그 자리를 메꾸어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리가 애매모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요크 상사>에서
하지만 그의 재능과 인기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던 프레드 진네만은 그를 <하이눈>의 평야지대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는 정말 심기일전하였습니다. 마치 초년병처럼 연기자체에 매달렸습니다. 그런 그의 열정은 <하이눈>의 곳곳에서 피와 땀으로 전이되어 훌륭하게 나타났습니다.
비록 죽음이 두렵긴 하지만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비겁하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보안관 윌리 케인은 마치 지나간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그 영화의 열연으로 새롭게 재기 무대로 올라섰고 스펜서 트레이시 이후, 두번째로 오스카상 남우주연상을 두번씩이나 받는 배우로 올라섰습니다.
* <하이 눈>에서
그는 감격에 겨운 나머지, 혹은 지나간 파란만장한 삶의 애환이 일시에 설움처럼 복받쳐서인지 시상대 위에서 한동안 말문을 닫고 눈물을 훔쳐내기만 했습니다. 어쩜 어디선가에서 패트리샤가 보고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몇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클라크 게이블에 비해서 게리 쿠퍼는 조용히 자신의 가정을 지키면서 남은 연기 생활을 했습니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 쿠퍼의 영원한 연인, 패트리샤 닐
패트리샤 닐은 브로드웨이의 연극무대에서 성공한 후 스물 한살의 젊은 나이에 당시 스물 다섯살이나 연상이었던 마흔 일곱의 게리 쿠퍼와 영화 촬영을 하면서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바로 그 운명의 영화가 국내에 <마천루>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던 1949년 킹 비도 감독의 <The Fountainhead>이었습니다.
부녀 지간 같은 나이를 극복하고 둘의 사랑은 불처럼 뜨거웠고, 패트리샤 닐은 게리 쿠퍼와 결혼하기를 소원했으며 자신에게 좀 더 많은 신경을 써 달라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1952년 게리 쿠퍼가 서부극 <하이눈>으로 역대 두번째 오스카상을 수상하면서 재기에 성공하자 패트리샤 닐은 사랑에 실패하고 배우로서도 실패하면서 도망치듯 할리우드를 떠납니다.
그녀는 게리 쿠퍼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일방적으로 절교를 하고 맙니다.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복귀한 패트리샤 닐은 1년 후 작가 로알드 달과 결혼하여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남편의 아이를 낳고 그런대로 아무 탈없이 잘 살았습니다.
* 노년의 닐
패트리샤 닐은 그 후 게리 쿠퍼와 헤어지고 나서 딱 두번 다시 만나는데 그 마지막 만남이 우연히 그녀가 게리 쿠퍼의 영화 촬영장에 불쑥 찾아간 것입니다.
패트리샤 닐은 자신의 남편과 자식들의 근황을 말하면서 밝은 모습으로 게리 쿠페에게 자랑했지만, 조용히 그녀의 말만 듣고 있던 게리 쿠퍼는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단 한마디의 말만 꺼냅니다.
"난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어!"
몇년 후인 1961년 5월 13일 게리 쿠퍼의 죽음을 신문 기사로 알게 된 패트리샤 닐은 비로소 그의 존재를 상실하면서 모든 삶의 긴장을 풀었다고 합니다.
2010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패트리샤 닐은 1963년 마틴 리트 감독의 영화 <허드>에서 열연을 하여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으며, 자신의 자서전 <진실>을 통하여 게리 쿠퍼와의 모든 사랑의 감정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 대표작 소개 ]
< 하이 눈(High Noon) >
서부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이 영화는 정통 서부극이면서 리얼리즘을 추구한 획기적인 웨스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이 영화의 주인공인 보안관으로 등장한 게리 쿠퍼가 두 번째 아카데미 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흑백 영화이지만 세월이 지나도 그 빛이 바래지 않는 고전으로, 영화 <역마차>와 웨스턴의 자웅을 겨루는 명작이기도 합니다.
또한 드미트리 티옴킨이 작곡한 주제곡인 "Do not forsake me,Oh my darling"은 어떤 서부영화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테마송으로 유명합니다. 촬영 당시 부인과의 별거, 좌골 신경통과 출혈성 위궤양 등으로 심신의 타격을 받고 있던 51세의 게리 쿠퍼의 수척한 표정이 이 영화를 더욱 실감나게 만들었습니다.
게리 쿠퍼의 상대역인 에이미 역으로 나온 당대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은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 영화는 러닝 타임을 영화 속 실제 사건의 진행사건과 일치시킨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영화의 상영 시간은 1시간 24분인데 영화 속에서도 사건이 진행되는 시간은 10시 40분부터 12시 4분까지 정확히 1시간 24분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낳았으며 그 사이 반복해서 관객들에게 시계를 보여주면서 결투가 정오(하이눈)에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계속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불후의 명작으로 일컬어져 오는 이 영화도 당시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은 받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관객들이 일반적으로 웨스턴에 기대하던 충족감을 만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웨스턴이라함은 절정의 총격전, 장대한 경치, 거침없이 악당들을 해치우는 주인공의 말쑥하고 확신에 가득찬 행동,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과의 로맨스가 곁들여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보안관 케인(게리 쿠퍼)은 나이 든 노총각일 뿐이며 더더구나 전문 총잡이도 아닙니다.
그는 죽음과 고립의 이미지가 깃든 극히 인간적이고 나약한 보안관일 뿐이며 홀로 악당들과의 대결을 앞두고 초췌하고 식은 땀을 흘리면서, 강인하고 자신감 있는 전형적인 서부의 사나이 이미지와 동 떨어진 인물인 것입니다. 멋진 서부극을 기대하였던 관객들은 뭔가 혼란스런 마음으로 극장을 나섰던 것입니다.
아마도 진네만 감독은 인간의 진지한 문제에 촛점을 맞추어,초인적인 영웅이 등장하는 종래 서부영화의 매너리즘을 배제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이래서 이 영화는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이후 <수색자>,<와일드 번치>,<용서받지 못한자>,<늑대와 춤을>같은 서부영화들이 이 계보를 이어왔습니다.
< 줄거리 >
영화는 헤이드리빌이라는 작은 서부 마을의 일요일 오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우선 불량해 보이는 세명의 총잡이가 평원에서 만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헤이드리빌 마을의 기차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한편 마을에서는 보안관 윌 케인(게리 쿠퍼)이 결혼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는 5년간의 보안관 생활을 접고 에이미(그레이스 켈리)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평범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윌이 5년 전에 체포했던 악당 프랭크 밀러(이안 맥도날드)가 감옥에서 풀려나서 12시 기차로 이 마을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가 오는 이유는 자신을 잡아넣은 보안관 윌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윌 때문에 자신들까지 피해를 볼까 전전긍긍하며 윌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5년 전 윌은 마을의 안전을 위해 무법자를 체포했지만, 무정하게도 이제 그것은 윌 개인의 문제가 되고 맙니다.
게다가 신부인 에이미까지도 윌이 악당들과 무모하게 맞서는 것을 반대하며 12시 기차로 혼자 떠나겠다고 나섭니다. 그녀는 총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퀘이커 교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윌은 떠날 수가 없습니다. 당장 떠난다 하더라도 악당들의 추격에 그의 삶은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의 손으로 5년 동안 지켜온 마을을 그냥 내버리고 간다는 것도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는 10시40분경부터 정오까지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윌이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다니는 절박한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상영시간이 87분인데, 영화 속 시간이 상영시간과 동일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영화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삽입되는 시계는 결투의 시간이 바짝바짝 다가오고 있음을 관객에게 실시간으로 환기시킴으로써 긴장과 서스펜스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결국 프랭크 밀러가 마을에 당도하여 악당은 네명이 되고, 윌은 혼자 그들과 맞서게 됩니다. 윌이 정오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결투를 위해 홀로 걸어 나오는 모습은 이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장면에서 게리 쿠퍼의 큰 키와 진중한 얼굴은 윌의 불안한 심리를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영화가 개봉 당시 모 신문에서 “인간 심리의 드라마”로 불렸던 것에는 게리 쿠퍼의 연기가 큰 몫을 합니다. 여느 서부극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주인공의 승리로 끝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의 축하도 받지 못하는 고독한 승리는 이제 서부 영웅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그 쓸쓸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전후(戰後) 한국 관객에게 감동을 준 이유이기도 했지요. <하이눈>이 <셰인>(1953)과 함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서부극으로 꼽히는 것도 바로 일반적인 서부극 특유의 폼생 폼사 없는 고독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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