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오대회요(五代會要)》 발해전(渤海傳)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건국과정은 일련의 역사적 사실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건국과정에 등장하는 집단은 고구려계와 말갈계로 대별할 수가 있는데, 고구려계통(高句麗系統)은 고려별종(高麗別種)인 걸걸중상(乞乞仲象)[혹은 大祚榮]과 그 가속(家屬)·고려지중(高麗之衆)·고려병(高麗兵)·고려여신(高麗餘燼)·고려포잔(高麗逋殘), 그리고 고려여종(高麗餘種) 등으로 표현되고, 말갈계통(靺鞨系統)은 말갈추(靺鞨酋)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말갈지중(靺鞨之衆)·말갈병(靺鞨兵)·비우지중(比羽之衆)·말갈반인(靺鞨反人) 등으로 지칭되었다. 또한 발해의 건국과정에는 3차의 정착지 이동이 있었는데, 이들이 경과한 지역으로는 고구려(高句麗)·영주(營州)·요수(遼水)·요동(遼東)·고려고지(高麗故地) 및 천문령(天門嶺) 서쪽[1차 정착지], 천문령 동쪽[2차 정착지], 읍루고지(읍婁故地)[계루고지(桂婁故地)], 太白山 동북, 오루하(奧婁河), 동모산(東牟山)[3차정착지:건국지] 등이 등장하였다.
건국과정에 등장하는 집단을 영주에서의 동주집단, 천문령전투 전후에 참여한 집단, 그리고 건국 직후에 참여한 집단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성격을 검토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이해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먼저 동주집단(東走集團)은 고려별종 집단과 말갈 걸사비우의 무리, 그리고 고려여종(高麗餘種)이었고, 696년 중반의 동주 이후 천문령전투 이전에는 遼東의 高麗故地에서의 1차정착과 이해고(李楷固)의 토벌군과의 전투, 그리고 천문령 동쪽에서의 唐軍의 격퇴 등과 같은 사건이 전개된다.
대조영집단과 걸사비우집단이 동주하여 1차로 遼東 북쪽지역 일대에 국가적 체제를 갖추자 唐은 이들 세력을 인정하고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임명하게 된다.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책봉(冊封)을 받을 당시 이들에게는 처음의 동주집단에 요서·요동 지역에 거주하던 고구려유민이나 말갈족으로서 동주과정이나 1차정착지에서 이해고의 토벌을 맞이하기 전에 부분적으로 참여한 집단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문령 동쪽에서 2차정착을 하는 시점에서 대조영 집단은 고구려계와 말갈계의 연합병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고구려계에는 영주로부터 행동을 같이 한 무리인 '고려별종'과 '고려여신'[고려지중;고려병]에 영주에서 천문령으로 이동하는 과정과 그 이후에 참여한 무리가 혼재되어 있었고, 말갈계는 영주에서 동주한 걸사비우 집단의 패잔병이 주축을 이루면서 동주 이후 부분적으로 참여한 집단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천문령에서 이해고의 추격군을 격파한 대조영은 그 무리를 이끌고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吉林省 돈화시(敦化市) 부근의 城山子山城으로 비정되는 동모산에 축성하고 거주한다. 이후 대조영이 용맹스럽고 용병을 잘하자 새로이 말갈의 무리와 '고려여신'이 점점 귀속해 온다. 그런데 최치원(崔致遠)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는 발해건국 전후에 참여한 집단을 '구려유신(句麗遺燼)'과 '물길잡류(勿吉雜流)'라고 구체적으로 거명한 주목할 내용이 있다. 이것은 최치원이 발해건국 전후에 참가한 집단과 지역을 이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로서 太白山지역의 高句麗 遺民과 속말수지역의 주민[속말말갈(粟末靺鞨)]이 그 주인공임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를 통하여 대조영이 동모산에 성(城)을 쌓은 뒤 새로이 참여한 '고려여신(高麗餘燼)'과 '말갈(靺鞨)의 무리'는 구체적으로는 태백산 지역의 고구려유민과 속말수 지역의 속말말갈이 중심적인 집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대조영은 698년 동모산에 건국하여 진국왕(振國王)이라 칭하고 공동의 적인 唐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양측의 필요에 의해 돌궐(突厥)과 서로 通交하게 된다. 그리고 건국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주변지역에서 고구려유민과 말갈인들이 편입되어 왔을 것이다.
건국지
698년에 발해가 건국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대조영이 이때 '진국공(震國公)' 걸걸중상에 이어 집단의 통수권자가 되었음을 의미하거나,아니면 걸사비우의 전사 후 그 집단까지 아울러 동주하였던 무리들 전체의 통수권자로 취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발해 건국 후 대조영이 진국왕(震[振]國王)을 칭했던 것도 이와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발해국의 실질적인 건국은 목단강 유역에 자리잡은 뒤인 700년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노태돈,〈발해의 건국〉,《발해사》,국사편찬위원회,1996)
발해의 초기 도읍지인 '구국(舊國)'은 그동안 돈화현의 평지성인 오동성(敖東城)으로 비정해 왔으나,오동성은 성의 짜임새나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발해의 도성으로 보기 어려우며 목단강 상류쪽의 영승유적(永勝遺跡)이 초기 도읍지로 여겨진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대조영 집단이 처음 자리잡았던 '동모산'은 지금의 敦化市 현유향(賢儒鄕) 城山子村의 성산자산성으로 보고 있다.이 산성은 목단강의 지류인 대석하(大石河)를 끼고 있는 해발 600M의 산 위에 구축되어 있다.이 산성의 동편의 평지에 영승유적이 있다.이 영승유적과 성산자산성 및 발해 초기의 귀족들의 무덤들이 있는 육정산고분군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다.성산자산성은 비상시의 방어처이지만 일단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평상시의 거주지는 아니었다.아직 본격적인 발굴이 행해지지 않았지만 영승유적이 초기 도읍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노태돈, 앞의 글)
건국자
한편 발해의 건국에는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대조영(大祚榮)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 걸사비우는 營州에서의 탈주 이후 이해고와의 1차전투 이전까지 당측에서 제1의 토벌대상이었지만, 걸사비우 자신이 새로운 건국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걸사비우의 죽음 이후에는 고구려유민을 지휘하던 대조영이 말갈의 무리까지도 아우르면서 발해건국에 있어서 명실상부한 중심인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또한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대조영의 관계는 《신당서》의 기록과 같이 부자관계로 해석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에서는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걸걸중상이 영주에서의 탈주에서 이해고와의 전투 이전까지는 고구려유민을 지휘하였을 것임은 인정할 수 있지만, 발해건국에서의 주동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역시 그의 아들 대조영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金毓불/《渤海國志長編》/1934
宋遼金元四史資料叢刊1/ 文海出版社/1977年版
鳥山喜一 著·船木勝馬 編/《渤海史上の諸問題》/ 風間書房/1968
박시형/《발해사》/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1979
朱國침·魏國忠/《渤海史稿》/ 黑龍江省文物出版編輯室/1984
王承禮/《渤海簡史》/ 黑龍江人民出版社/1984
宋基豪 역/《발해의 역사》/한림대출판부/ 1987
임상선 편역/《발해사의 이해》/ 신서원/1990
韓圭哲/ 《渤海의 對外關係史 - 南北國의 形成과 展開》/ 圖書出版 新書苑/1994
宋基豪/《渤海政治史硏究》/ 一潮閣/199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10(발해)/ 1996
임상선/《발해의 지배세력 연구》/ 도서출판 신서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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